
영어학과
김강 교수
병역기피는 늘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다. 유명 연예인과 운동선수의 병역 비리가 온 나라를 비난과 분노로 들끓게 한다. 그들 대부분이 개인적으로 혹은 조직적으로 병역면제 브로커와 관련됐으며, 해당 범죄에 대한 법적 처벌이 뒤따르면서 스포츠와 연예계의 위기까지 다다른 적도 있었다.
운동선수들 특히, 프로선수와 연예인들이 병역의무를 피하려는 치열하고도 교묘한 '군사작전'은 비단 어제와 오늘만의 뉴스는 아니다. 운동감이나 인기가 절정인 시기에 군대에 간다는 것은 예상되는 금전적 수입 포기와 더불어 선수 생명 연장과 인기 유지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군 복무 대신에 이들이 벌 수 있는 돈은 평범한 직장인들에게 어림없는 액수일 것이며, 사회유명인으로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는 기간이 길어야 평균 3년 정도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군대에서 빠지기 위해 불법적인 방법마저 동원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해 보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이 시대 병역의무는 누구의 몫인가?
'로마인 이야기'의 저자 시오노 나나미는 책의 서두에서 인류의 역사발전에 대한 중요한 질문 하나를 던진다. 지성은 그리스인, 체력은 켈트인과 게르만인, 기술력은 에트루리아인, 경제력은 카르타고인들 보다 뒤떨어진 로마인이 어떻게 "로마제국의 영광과 평화"(Pax Romana)를 이룩했냐고 묻는다.
저자는 그 이유로 상대를 포용해 동화시킨 로마인들의 관용과 개방성, 그리고 노블리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꼽았다. 로마의 귀족과 원로원 의원들이 '사회적 신분'(노블리스)에 걸맞게 몸을 사리지 않고 기꺼이 '의무'(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것이다.
이후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를 일컫는 것으로 귀족의 역사가 장구한 유럽 사회를 지탱해온 정신적 뿌리가 되었다. 귀족으로 정당하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명예'(노블리스)만큼 '의무'(오블리제)를 다한다는 귀족 가문의 현실적 유산인 셈이다.
전쟁이 나면 귀족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싸움터에 앞장서 나가는 기사도 정신도 바로 여기에 바탕을 둔다. 셰익스피어 사극 '헨리 5세'에는 자신들의 영토인 아쟁쿠르(Agincourt) 전투에서 영국군에 의해 무참한 죽임을 당한 수많은 프랑스 귀족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고국의 명예를 위해 영국해협을 건너온 영국군과 마찬가지로 프랑스 귀족들도 지휘관으로서 전장의 선두에서 조국 수호를 위한 목숨을 바친 것이다.
이러한 귀족사회의 전통적 모럴은 면면히 이어져 영국에서는 지도층 자제가 입학하는 명문교 이튼 칼리지 졸업생 가운데 무려 2,000여 명이 1, 2차 세계대전에서 목숨을 잃었고, 얼마 전 서거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차남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에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여왕 자신도 2차 세계대전 당시 육군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철강왕 카네기, 석유 재벌 록펠러에서부터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갑부 빌 게이츠에 이르기까지 미국 부자들의 자선 기부문화도 이런 전통을 물려받았다. 명문 집안을 지키려는 일종의 자구책일 수도 있겠지만, 도덕적 의무를 다하려는 지도층의 솔선수범한 자세는 국민정신을 결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운동선수들과 연예인들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해야 하는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냐 아니냐는 그리 중대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국민으로서 남자라면 당연히 해야 할 4대 의무 중 하나인 병역을 거짓과 사기로 회피했는지의 문제다. 국위선양, 인기, 돈과 같은 가치들은 개인의 사회적 의무를 성실하게 이행하고 난 다음에 차순위 고려사항이 아닐까.
최근 글로벌 스타 방탄소년단 BTS 멤버의 병역특례를 놓고 정치권의 주문이 사납다. 국방부와 병무청은 추상같은 호통에 주변 눈치를 살피는 듯 연신 두리번거린다. 대체 언제부터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이 연예계 스타들의 병역문제까지 고충 민원으로 받들어 생존적 해결에 나섰는지 연유와 유래가 궁금하다.
병역기피와 병역특례의 차이는 또 무엇인가. '방탄'소년단이면서 군대를 피하고 칼'군무'를 추며, 수호군대 '아미'(Army)는 그들이 군에 가지 않도록 혹여나 지켜주는 것일까. 아이러니다.
아이돌 그룹의 병역을 여론조사와 국민투표로 결정하려는 생각이 과연 공정과 정의를 강조하는 정부의 온전한 자세에서 비롯된 것일까. 여태껏 공인으로서 한 번도 스스로 나서서 국가와 사회를 위한 '출세한 자의 의무'를 실천한 적이 없어서일까. 게다가 BTS는 애초부터 K팝 한류를 통한 국제위상 제고를 목표로 가요계에 나선 것일까. 여론조사에 답한 이삼십대 절반 이상이 부정적인 것은 당연한 이치다.
매번 뜨거운 사회적 감자가 된 병역회피로 법적제재를 받은 사람 중에 다수는 잘못된 판단을 반성했겠지만, 혹 '재수 없이 나만 걸렸다'고 탓하는 염치없는 이들이 더욱 생기지 않을까 무섭다. 그로 인해 지금 이 순간에도 버겁지만 정직한 국방의무를 잠자코 수행 중인 우리 젊은 병사들이 침체한 사기로 허탈하진 않을지 염려스럽고 미안하다.
요즘 우리는 돈과 권력을 최고로 여기는 물질 자본주의 격랑에 휩쓸려 진실로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진실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를 망각한 채 오직 남보다 높이 올라가고,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많이 누리는 일에 황급해 보인다. 가족, 학교, 지역사회, 국가와 같은 공동체의 붕괴는 고귀하든 보잘것없든 간에 개인 각자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이에 따른 사회적 역할을 제대로 이행치 못하는 순간에 촉발한다.
혹자는 인생이란 공평하지 않으며 이 사실에 익숙해지라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적 경험은 다시 강조한다. 주어진 책임과 의무에 정직하고 성실하게 노력한 자만이 삶의 최종적 승리자가 된다는 진리를. 오늘을 지혜롭게 사는 양심적 '카르페 디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