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학과
김강 교수
적과 흑'의 주인공 쥘리엥 소렐은 가난한 제재소 집 아들로 태어나 노동자 계층에 속한 낮은 신분의 인물이다. 그는 어릴 적부터 일은 하지 않고 책만 읽는다는 이유로 늘 아버지의 구박 속에 평민 출신이라는 열등감을 갖고 자랐다. 그의 꿈은 군인이나 사제가 돼 상류사회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늙은 군의관의 경험담을 듣고서 빨간 망토를 걸친 나폴레옹처럼 멋진 영웅이 되고 싶었고 집 근처 성당의 신부에게 라틴어를 배우게 되면서 위엄과 존경을 누리는 검은 사제복의 성직자를 꿈꾸었다. 명예를 얻으면 자신의 비천한 신분을 극복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운수 좋은 어느 날, 똑똑한 머리 덕분에 쥘리엥은 큰 저택에 사는 부자 레날 씨의 가정교사가 돼 출세의 기회를 얻는다. 상류층 허세를 증오하면서도 상류층을 갈망한다. 레날 부인의 순수함에 반해 사랑에 빠지지만 부정이 들통나 신학교에 들어간다. 그 후 다시 후작의 집에서 일하면서 마틸드 양의 사랑을 얻게 된다. 두 사람의 결혼은 레날 부인의 편지로 깨어지고 이에 격분해 부인에게 총을 쏜 쥘리엥은 사형에 처하게 된다.
스탕달은 '적과 흑'의 주제를 강렬한 색채를 통해 제시한다. 적과 흑은 붉은색과 검은색, 군직과 성직을 상징한다. 나폴레옹 실각 후 왕정으로 복고한 신분제 사회에서 군인과 성직자는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적과 흑은 오직 출세를 추구하는 주인공의 꿈이자 목표다. 작가는 가난한 청년 쥘리엥을 통해 귀족계급의 부조리함과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비판한다. 신분 상승을 위한 주인공의 도전과 실패를 통해 사랑과 명예, 재물 등의 가치 중 인간이 진정으로 추구 할 것이 뭔가를 궁리한다.
마리 앙리 벨. 소설 '적과 흑'을 발표한 스탕달의 본명이다. 발자크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 명인 그는 어릴 적 프랑스 혁명을 겪었다. 열여섯 살 무렵 고향 그르노블을 떠나 나폴레옹의 관리가 돼 프랑스와 유럽을 돌아다녔다.
1814년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군인, 군무원, 외교관으로 지냈던 스탕달의 미래도 어둠이 깊어진다. 이 무렵 이탈리아로 건너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작가로서 '라신과 셰익스피어'를 펴내고 낭만주의 운동을 주도한다. 1830년 신문에 보도된 실화에서 영감을 얻은 '적과 흑'을 스탕달이라는 필명으로 간행하고 1839년 발자크가 "숭고함의 폭발"이라고 극찬한 '파르마의 수도원'을 써냈다. 말년에 거리에서 횡사했지만 열정적인 생애를 요약하듯 생전에 이탈리아 말로 써놓은 "밀라노인 베일레,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라고 쓰인 묘비가 파리 몽마르트르 언덕에 우뚝 서 있다.
발표 당시 연애소설이라서 별 인기를 누리지 못했던 '적과 흑'은 금세기 들어 문학적 가치를 인정받는다. 스탕달은 이 소설에서 하층계급 청년과 상류층 여인의 사랑 이야기를 명쾌하고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다. 거기에 프랑스 사회의 모습도 사실적으로 드러낸다. 당시 프랑스는 계급에 따라 많은 차별이 존재했다. 귀족과 성직자, 부자가 권력을 쥐었고 대다수 평민들은 불평등과 억압을 견뎌야 했다.
2022년, 대한민국은 어떤 사회일까. 사회 상류층 식솔들은 자신이 공정하고 청렴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정직한 보통 국민이라면 감히 저지를 수 없는 비리와 황당한 궤변, 애매한 기억력을 그들은 긍지 삼아 사는 것일까. '내로남불'이 번식의 기본 정석일까.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개천에는 용 없다'로 변한 듯하다. 부자의 자녀는 더 부자로, 가난한 집 자녀는 더 가난하게 대물림 받는 부조리한 세상이 된 지 제법 오래다. 한때 사회적 성공은 교육이었다. 누구나 누릴 수 있는 동등한 권리였다. 지금은 금력과 권력이 가문의 성패를 판정한다. 그래서 공정과 상식을 유독 강조하는 것일까.
어떤 자녀들은 표절, 대필, 약탈적 학술지가 합격의 비결이고 어떤 부모들은 가짜를 감추는 재력과 사교술을 입신용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른다. 거짓으로 꿰찬 성공의 공포와 어둠, 우리 시대 또다른 적과 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