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완의 '커피한잔'> 맞다. 언론 탓이다.
신문방송학과
조경완 교수

1997년 6월 어느 비오는 토요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캐임브리지의 하버드 대 교수클럽에는 당대 최고권위의 언론인, 저널리즘 학자 25명 모였다. 길다란 탁자에 앉은 그들은 유명 TV 사주와 앵커, WP와 NYT 편집책임자, 전국 최고권위 바카라사이트 아벤카지노의 저널리즘 교수들이었다. 디지털 시대는 막 시작하는 중이었고 전통 미디어는 여전히 잘 팔리고 있었지만 이들은 이미 자신의 직업과 관련해 뭔가 심각하게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해 빗길을 뚫고 모인 것이었다.

몇 년후 이 모임은 the committee of concerned journalism, 즉 ‘저널리즘을 걱정하는 위원회’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게 된다. 이 사람들은 자신과 동료들이 생산하는 많은 기사들 가운데 그들이 ‘저널리즘’이라고 인정하고 싶은 기사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업이 공공의 이익에 기여하기 보다는 오히려 공공의 이익을 해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남몰래 느껴오던 터였다.

이들은 조사에 착수했다. 1999년 미국인들 중 45%만이 언론이 민주주의를 보호한다고 답했다. 1985년 같은 조사보다 10%포인트가 낮아진 답이었다. 2011년에는 심지어 언론이 민주주의를 해친다고 답한 미국인의 비율이 42%에 달했다. 언론이 자본과 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냐는 질문에는 단지 15%만이 그렇다고 답했다.

미국의 언론은 오락이 되어가고 있었다. 2000년에 이르자 미국 기자들은 대중이 자신들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알게 되었다. 위원회 멤버인 필라델피아 인콰이어러의 편집장 맥스웰 킹은 이 당시 “우리는 경영압박과 수지를 맞추는 일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고백했다. 위원회의 다른 편집책임자들은 그의 말에 잠시도 망설이지 않고 동의했다. 21세기가 시작되자 뉴스산업의 기업적 구조로 인해 유명매체건 군소매체건 모든 저널리스트들은 ‘존재론적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위원회는 고품질의 저널리즘을 사수하기위해 애처로운 노력을 펼쳤지만 그 성과는 바카라사이트 아벤카지노의 저널리즘 관련 학과 수업시간에 그쳤다. 저널리즘의 회복을 호소하는 글과 TV코멘트는 “그래 당신말은 맞아” 정도의 반응을 얻는데 그쳤다.

그사이 미국은 민주당과 공화당으로 완전히 쪼개졌다. 인종갈등은 70년대로 되돌아간 듯 했고 총기난사 사고는 빈발했으며 자연재해 대응시스템은 망가졌다. 9.11 테러가 발생할 만큼 대외적으로는 증오를 키웠으며 트럼프 현상이 벌어질 만큼 대내적으로는 양극화가 심해졌다. 저널리즘은 어디로 갔는가?

역사상 최고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한국의 저널리즘은 어떠한가. 국민은 저널리즘이 공익에 복무하고 있다고 믿는가. 중요신문과 방송 뉴스의 신뢰도는 아직 남아있는가. 중요매체의 편집자, 데스크, 부국장, 국장들은 2000년 필라델피아의 편집책임자처럼 경영압박에 짓눌려 저널리즘의 기본을 팽개치고 있지는 않은가. 기자가 되겠다고 언론사에 입사한 젊은 심장들은 수습교육을 받는 동안 공익보다는 사익(社益)을 우선하는 기능인으로 변신해버리지 않는가.

한국의 기자들은 이런 와중에 광우병 파동, 황우석 사태, 천안함 사건에 대해 엉터리 보도를 주저없이 생산했고, 결정적으로 세월호 사건 보도에서 구정물을 뒤집어 쓴 뒤 아직까지 명예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기자들이 취재를 잘 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데스크가 편협하기 때문이다. 편집국장과 보도국장이 저널리즘 본연의 사명보다 클릭수와 시청률을 염두애 두기 때문이다.

저널리즘의 실종 이후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었다. 오늘도 정확한 취재와 분별력있는 논평이 없는 대한민국은 아수라장이다. 서해공무원 피격이 월북이었나 아니었나. 성희롱 발언 정치인 징계가 정당했나 부당했나. 원전관련 수사가 정치보복인가 아닌가. 집값을 안정시키려면 규제를 풀어야 하는가 강화해야 하는가. 핵실험을 만지작거리는 북한에 유화책을 써야하나 강경책을 써야 하나.

기자들은 좌우로 갈린 민심 사이에서 양측 주장을 중계할 뿐 스스로 사실을 파고드는 노력을 게을리 하거나 안한다. 오직 사실확인만이 생명인 저널리즘의 기본을 피곤해 한다. 그러니 검증이고 뭐고 없는 개인 유튜버들의 주장이 난무한다. AI는 뉴스 소비자의 취향을 귀신같이 골라내 입맛에 맞는 컨텐츠들만을 진설한다. 균형은 사라지고 상대의 입장을 고려하려는 최소한의 배려는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맞다. 언론탓이다. 책임지고 반대파의 공격을 감내할 용기있는 저널리스트들이 적은 탓이다. 검찰개혁 정치개혁 연금개혁 국방개혁 복지개혁 노동개혁 못지않게 언론개혁도 자주 거론된다. 지금 기자들이 스스로 개혁에 나서지 않는다면, 저널리즘 본연의 가치를 지키려 하지 않는다면 회복불능의 사태를 맞게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