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업치료학과
김은성 교수
일주일 사이에 온 세상이 하얗다.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이 흡사 눈송이 같기도 하다. 꽃눈인지, 눈꽃인지 모를 그 작은 이파리 하나에 마음이 일렁인다. 창 너머 만개한 벚꽃을 보고 있자니 가만히 있을 수 없어 가볍게 채비했다. 집 근처만 나와도 벚꽃, 목련, 동백, 홍매화가 너나 할 것 없이 꽃망울을 터뜨렸다. 잠시지만 걱정, 근심은 저절로 사라지고 몰랐던 사실에 개안(開眼)하듯, 감탄만 남았다. ‘아! 봄이구나!’
이렇게 흐드러지게 핀 벚꽃이, 홍매화가 봄을 알렸다. 조금은 가벼워진 옷차림과 아침 출근길 코끝을 스치는 바람의 온도에 그저 겨울이 지나간 줄만 알았는데 그 끝자락에 봄이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여기저기 만개(滿開)의 장관을 눈에 담고 카메라에 담느라 사람들의 시선이 한참 높은 곳에 머문다. 비록 마스크로 얼굴의 절반은 가려있었지만 필자가 본 이들의 얼굴에 봄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가 한껏 머금어졌으리라.
한참을 보고 있자니 무언가 다시 혹은 새로 시작해야만 할 것 같고, 지금 시작하는 일들은 왠지 모르게 다 잘 될 것만 같은 벅찬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보는 기분에 문득, ‘사람인 나도 때를 모르고, 혹은 때를 못 맞춰 지나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데 하물며 이 벚꽃은 어쩜 이리도 피어야 할 때를 알고 잘도 피어 봄을 알리는 것인가!’ 하는 우문이 들었다. 자연의 이치라지만 “때”라는 것을 놓치고 후회하고, 모르고 지나쳐 아쉬움을 경험한 필자로서는 시기적절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벚꽃이 새삼 부럽기까지 했다.
우리는 얼마나 “바로 그때”라는 기회의 순간을 잘 붙잡았을까? 공부에도 때가 있고, 배낭 메고 하는 전국 일주도 때가 있으며, 결혼에도 때가 있다고들 한다. 사소하게는 어르신들이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밥때”도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찰나이지 않은가. 널리 애송되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만 보아도 소위 타이밍이라고 하는 그 적기(適期)는 심심찮게 강조되고 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중략)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떠나는 이에게마저 그 때가 있다는 것이 슬프게 다가오지만 이것도 ‘박수칠 때’ 떠나면 된다고 생각하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모르고 지나쳐 버린 그 시기는 그저 아쉽지만, 알고도 모른체 했거나 조금만 나중에… 하며 미루다 시기를 놓쳐 버린 일은 안타깝다. 이번 주말엔 부모님을 찾아뵈어야지 했다가도 회사 일이 급하고, 친구와의 만남이 더 즐거워 그 “때”를 놓쳤더니 평생 후회하더라는 사모곡에서처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미안하다는 한마디를 건넬 때를 놓쳐 친구와의 관계가 서먹해졌던 것처럼, 평생 이 사람과 함께 해야겠다며 큰 용기를 내어 고백해 화목한 가정을 이룬 것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가슴 벅차도록 영롱했던 개화(開花)의 때도 잠시, 어느새 발밑으로 낙화(落花)가 가득하다. 피는 꽃은 늘 지기 마련이라지만 왔구나! 했던 반가움도 잠시, 어느새 가려는 봄날이 아쉽기만 하다. 필자는 여러분이 다시 없을 올봄에 하려고 했던 것은 무엇인지, 또 그걸 해내었는지 감히 묻고 싶다. 분명, “이때”에 계획한 것이든, 불현듯 생각난 것이든 있을 것이다. 우물쭈물하며 시기만 기다린다면 “바로 지금”이다. 작은 꽃잎이 때를 잘도 알고 신호를 주는 이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