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방송학과
조경완 교수
지난 보름간 광주의 문사(文士) 두분이 쓰신 글을 보면서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는 4월 5일 신문에 실린 광주일보 장필수 국장의 ‘복합쇼핑몰 논란이 남긴 것’이란 글이었다. 요지 부분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논란을 지켜보는 외지인들은 광주에선 정치와 이념이 경제 논리를 지배해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시장 논리도 상생으로 상징되는 ‘광주정신’ 앞에서 무력화되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곰곰이 되새겨 볼 때가 됐다”
다른 하나는 13일자 신문에 실린 전남대 최영태 교수의 ‘광주는 정치과잉 도시’란 글이었다. “광주도 이제 정치가 아닌 일상적 삶에 관한 문제들, 이념이 아니라 실용적 주제에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광주와 호남 정치가 정상으로 갈 수 있으며, 많은 희생을 치르며 획득한 민주 도시의 명예도 계속 지켜낼 수 있다…”
사상과 사변(辭辨)의 자유로운 유통을 옹호하는 나로서는 이분들의 글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잇달아 나온 이 글들에서 알 수 있는 건 대선 이후 냉정을 되찾고 우리 고장의 현주소를 되짚어 보는 지식인들의 멘탈리티였다.
장국장의 글에서 뼈아프게 들려오는 건 이른바 ‘광주정신’이라는 족쇄다. 1980년 이후 한국의 민주주의를 완성시키는데 피투성이의 희생을 치른 광주에는 일종의 이념적 우월감이 형성되었다. 언론은 광주를 민주주의의 성지(聖地)라고 불러주었다. 우리는 성지의 시민들이었다. 서울 제주 춘천 대구에서 어떤 정치적 주제를 놓고 열리는 세미나엘 가면 광주에서 온 인사는 거룩한 자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늦은 밤의 광주는 초라한 어둠이 감돌았다. 대한민국이 소득 3만5천불의 성장을 이루는 동안 광주라는 도시엔 폐점포가 늘고 젊은이들은 노량진 독서실로 줄지어 떠나갔다.
최교수의 글에서 백번천번 공감되는 건 이젠 제발 시민들이 실용적인 문제들에 대해 뜻을 모으고 지혜를 구하는 모습들을 주변에서 보고 싶다는 점이다. 실용이란 무엇인가. 경제와 문화다. 먹고 살고 즐기는 문제다. 그러나 광주는 정치만능주의를 택했다. 물산과 투자가 없는 고장의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지는 모르되 나중에는 모두가 정치과잉, 이념과잉이 되어버렸다. 누항의 필부도 시사평론가가 되어 열변을 토하고, 셋만 모이면 고작 편중된 유튜브 지식으로 뜻맞지 않는 정치인들 욕하며 세월을 보내는 곳이 광주 아니던가.
나는 광주정신, 구체적으로는 5.18 정신이 확대 과장되는 것을 경계한다. 사십년전 현장을 겪은 누구나가 뚜렷이 기억하듯 5.18은 반독재 민주주의 무장투쟁이었다. 도청앞 민주화 대성회에서 시민들은 “김대중씨 석방하라” “전두환이 물러가라”는 구호 외에 “김일성은 오판말라”는 구호도 빼먹지 않았다. 용공으로 매도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5.18 정신은 민주 인권 평화의 정신이라고 정의 내려지는 애매한 상황으로 흐르더니 8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총체적 모순을 타파하는 만능열쇠가 되었다. 반미의 사상적 뿌리가 되었다가 재벌타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가 결국은 좌파진영의 모든 단위 주제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이념적 화수분이 되었다. 악에 대항하는 악은 선이라는 논리가 지배했다.
이 때문에 광주에선 대기업 유치를 바라면서도 재벌을 욕하고, 삶의 질을 개선하자고 하면서도 개발보다는 보전을 주장하고, 인재를 양성하자고 하면서도 명문대 입시위주의 교육은 규탄했다. 빛날지어다 광주정신이여. 윤석열 당선자가 후보시절 광주에 와서 복합쇼핑몰이 들어설 수 없는 도시 광주의 현실을 말할 때 책임있는 인사들은 그말이 광주의 경직성, 이념 과잉성, 머저리 같은 엄숙주의에 대한 조롱임을 알았어야 했다.
광주는 세계인이 경탄하는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있게 한 도시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정권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때 광주마저 납작 엎드려 버렸더라면 오늘날 우리가 이룬 민주주의는 없었을 것이다. 광주는 그 후로도 10년간 더 울부짖었고 30년간 더 가난했다. 이런놈에 불공평이 어디있나.
바야흐로 선거철이다. 유력한 광주시장 후보 두분도 광주를 잘사는 도시로 확 바꾸겠다고 서로 열변을 토한다. 진작 그랬어야 한다. 광주는 이제 광주정신에 발목잡히지 말아야 한다. 정치과잉의 바보들이 모여사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이젠 바뀔때도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