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2002년 12월 19일, 이틀 전 세상에 나온 아기를 집에 데려가는 길이었다. 장시간의 산고로 몸과 마음이 지친 아내는 신속한 귀갓길을 재촉했지만 필자의 느닷없는 탈선에 황당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날은 16대 대선 마지막 투표일이었다.
아내는 갓난애를 포대기에 칭칭 싸매고 병원을 나서는 마당에 무슨 투표냐고 투덜댔다. 그러나 나와 아내의 두 표가 대선 향방에 기여할 수 있다는 불타는 사명감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아 기어이 설득 후 투표소로 질주했다.
이런 사정으로 그 아이는 당선자와 함께 태어난 '대선동이'가 되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가족의 철저한 관리 덕에 세상 무서울 것 없는 열혈청년이 되어 여전히 모든 것이 제 맘 인양 활개 치며 살고 있다. 다행히도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독자적 의지를 제법 갖추게 되었다. 어찌 됐거나 그 애가 곁에 있는 한 대선일의 치열함과 결연했던 의지는 후보자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두고두고 되새길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줏대가 어찌 이리 약한지. 혀를 깨문 언약과 맹세도 시간에 주눅 들어 흔들리는 것일까 아니면 주어진 자극에 적절히 반응하며 변하는 것일까.
그 이후 3번의 대선을 더 치렀다. 처음 당선자를 향해 들끓었던 감격스러운 환호와 낭만적 기대는 금방 사라지고 늘 말엽이면 그를 향한 이성적 판단과 차가운 시선만이 팽배했다. 당시의 시류가 어찌할 수 없었던 대안적 판단의 결과였든 혹은 스스로 열정에 취해 자진했던 지지의 업보였던 간에 그때의 선택이 진실로 미덥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곧이어 예정된 또 다른 선택의 시간이 차마 두렵다.
최근 대선 후보자의 정책 의지는 오간데 없고, 추문과 모욕만이 구구절절 넘쳐난다. 각자도생 셀프방역과 말싸움 유세 밖 다른 뉴스는 부질없는 듯하다. 새로운 결속이니 절망의 단절이니 선기세 잡으려는 선동들도 더없이 거칠고 자극적이다. 그러다 보니 세상 떠난 망자의 목소리를 합성한 해괴망측 홍보까지 가세한다. 무속 파동, 불법 의전에 이은 잔칫상 차림이 너무 살벌하다. 외신이 최악의 선거라 부를만하다.
사실 이번 선거에 바라는 바도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 국민의 뜻을 겸허히 따르는 자세, 그리고 이를 적극적이며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는 후보자를 꼼꼼한 검증을 통해 판별하는 것이다. 후보를 향한 '일시적인 바람'이 아닌 그의 '궁극적인 실체'를 가려내는 것이다.
지난날처럼 합법 선거로 정권을 탈환했다고 혹은 정치적 대표성이 검증됐다고 해서 푸른 기와지붕 밑에 한데 모여 막걸리 나누며 동지의 노래를 합창할 것은 없다. '586'이니 '이대남'이니 안주 삼아 세대 간 계급주의를 조장할 일도 아니다. 내 식구만 챙길 게 아니라 이웃의 가려운 등도 긁어야 한다. 권력의 사유화, 허울뿐인 공정과 평등을 경계하자. 독점의 병폐는 은밀한 부패다.
'민의는 간데없고' 파벌주의나 지역감정을 조작하는 정당만이 오롯이 버틴다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린다는 정치가 그 무슨 소용일까. 정당제도는 민주주의를 제대로 구현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일 뿐이다. '당'의 기능은 '백성의 뜻'을 수용하여 호혜의 정책을 펼치는 것이 마땅하다. 권력투쟁의 장소나 도구가 절대 아니다. 입에 쓰더라도 때로는 달게 삼켜야 한다. 또다시 '살생'이 아닌 함께 사는 '상생'이 필요한 순간이다.
셰익스피어가 1597년경 집필한 희극 '베니스의 상인'에는 유대인 샤일록의 인육 재판과 더불어 여주인공 포샤의 결혼과 관련된 세 개의 선택 상자가 등장한다. 금, 은, 납으로 각각 만들어진 상자 중에서 그녀와 결혼할 수 있는 증표는 과연 어디에 들어있을까?
지체 높은 구혼자는 빛나는 금과 은을 선택하지만, 순박한 바사니오는 납 상자를 열어 포샤의 마음을 얻는다. 그럴듯한 겉모습에 속아 현명한 선택을 그르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풍자한 이 장면은 외양과 실재가 때론 큰 차이가 있음을 교훈처럼 제시한다. 생존적 삶의 지혜와 극단의 재치를 보여준다.
오는 3월에는 우리의 역사를 새로이 쓰자. 지금 지나간 선택에 한숨 쉴 때가 아니다. 국가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마음의 눈을 뜨고 숙연할 무렵이다. 사회의 리더로서 정직하고 실천적인 언행으로 국민의 존경과 신뢰를 마지막까지 누리는 '좋은' 대통령이 뽑히기를 우리는 희망하고 고대한다. 포샤의 지혜처럼,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다. 제대로 골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