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동네를 지나다 가게 이름에 눈을 찔렸다. 새로 생긴 식당인 듯하다. 간판 머리에 큼직이 박힌 상호가 아주 기묘했다. 무엇을 파는 것인지 추측이 불가능할 만큼 난해했다.
'머선 129'. 대체 무슨 이름이 그 모양이던가. 영어가 본업인 머릿속에 마침 번개가 친다. 마션, 화성인(Martian). 화성(Mars)과 관련된 우주적 업체인가. 그러면 129는 화성 탐사선 시리얼 넘버인 셈. 홍콩배우 주성치가 감독하고 주인공으로 나온 황당하게 감동적인 외계 동물 코미디 영화 'CJ7-장강7호'처럼 그런 절묘한 연상일까. 내심 식당의 퓨처리스틱 비즈니스 플랜에 탄복하며 부디 젊은 손님 가득 모여 번창하기를 기원했다.
며칠 후 인터넷 검색 결과는, 늘 그렇듯, 가정의 확신과 실증 검색의 엄청난 차이를 증명한다. 아리송했던 암호의 의미는 '무슨 일이고!' '무슨'을 '머선'으로 바꾸고, '일이고'는 숫자 '129'로 변환했다. 유래는 확실치 않지만, 아프리카와 또 다른 대륙의 '인방' 호스트들이 소유권 주장에 나섰다. 네티즌의 '즐용' 단어를 한 TV 예능 출연자가 장난기로 뱉은 말에 자막이 붙어 대중화됐다고 알린다.
이후 괴생명체 에이리언 머선의 진화는 파격적이다. 가장 먼저 'ㅓ의 반격'. 스타일은 '서타일', 스타벅스는 '서타벅스'라고 부르는 식이다. 머선 129를 선점한 랜선 장사꾼들의 고향 경상도를 반영한 것이다. 세종대왕 창제 훈민정음의 창의적인 듯 무례한 변신이다.
그다음은 숫자를 통한 의미전달이다. 5959는 '오구오구', 700은 '귀여워'라는 뜻. 초성 'ㄱㅇㅇ'을 비슷한 외양의 숫자로 표현한 것이다. 한때 무선호출기 시절 '빨리빨리' 대신 8282를 치던 것과 유사한 화법이다. 언뜻 멋져 보이지만 문화적 소외감에 씁쓸하다.
아언각비. 1819년 58세의 정약용은 18년의 강진 귀양을 마치고 고향을 찾는다. 그해 겨울 타향살이 여독에도 불구하고 '아언각비' 3권을 펴낸다. '아언'이란 평상시 사용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쓰는 언어에서 '각비', 잘못을 깨닫자는 취지의 이름이다.
다산은 '학(學)이란 깨닫는 것(覺)이다. 깨닫는 것은 잘못을 아는 것이다. 잘못은 평상시의 언어에서 깨달아야 한다'고 저작 목적을 밝힌다. 예를 들면, 장안이나 낙양은 중국의 수도인데, 조선 사람들이 서울을 호칭하며 그런 단어를 잘못 사용한다는 것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면밀히 검토하여 뜻이 바뀌고 변화된 근원을 찾아 제대로 된 언어생활을 해야 한다는 그의 깊은 의지가 스며있다.
지금 MZ세대는 문자보다 영상에 익숙하다. 책 대신 컴퓨터를, 글 대신 이미지로 자신의 마음을 주고받는다. 왜곡과 변형은 필요악이다. 열공, 지대, 불펌, 냉무, 오나전, 음야, 오링나다, 존나, 솔까말, 피방, OTL, 에바, 뉴비 등은 이제 뒤떨어진 애교에 속한다. 오징어 게임의 깐부는 고사하고 나이따, 납견, 뇌피셜, 레게년, 방셀, 억텐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외국어가 아닌 '외계어'에 가까운 말들은 해설이 따로 없다면 의미파악이 거의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들이 이러한 표현을 온라인에서 아무런 지침이나 여과 없이 사용한다는 점이다.
특정한 시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대를 규정하는 독특한 문화코드를 생성하고 이를 공유함으로써 일종의 공동체와 공동의식을 형성한다. 젊은 세대도 마찬가지다. 자신들이 드러내는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들만의 언어와 이미지를 독창적으로 만들고 전유한다.
이는 어른들에 의해 이미 체계화되고 질서화된 기존의 사유체계 안에서 그들의 정서를 세우고 소통하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기성세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절대 이념의 사회적 통제에서 벗어나 그들만의 감성을 창조하려는 '저항의식'이 강하게 작동한다.
청소년의 우리말 왜곡은 경박하고 말초적인 예능방송과 더불어 '나떼'를 즐기는 어른의 책임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자신의 잘못된 언행을 인정하지 않고 되려 고집한다. 자라면서 '의'와 '예'에 관해 수도 없이 배웠지만, 진정으로 실천했는지 마음을 열기가 어려울 것이다. 어른의 말 한마디, 그리고 행동거지가 그들에게는 '촌철'이자 거울이다. 그만큼 남 앞에서, 특히 젊은이를 향한 말과 행위에 세심한 주의를 쏟아야 한다.
이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는 속담은 더 이상 가능한 현실이 아니다. 말이 어느새 장난감처럼 오락 도구로 전락한 탓이다. 오늘 다산의 교훈처럼 우리글과 말의 '인싸'가 되어 올바른 말에 대한 책임을 다시 새겨보자. 잉? 나랏말싸미 머선 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