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완의 '커피한잔' 그가 죽어버렸다
신문방송학과
조경완 교수

제기랄, 죽어버렸다. 이렇게 역사의 한페이지가 또 넘어가 버리는가. 80년을 직접 겪은 세대들에게 크건 작건 가슴에 흉터를 새긴 그자가 죽어버렸다, 천수를 다하고.

악마였다. 공포였다. 우리는 그를 증오했고 저주했고 조롱했다. 자그마치 40년 세월이다. 그러나 그뿐, 그는 천연덕스러웠고 자기확신에 찬 태도였다. 사람 환장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몇주 전 대통령후보 이재명은 광주를 방문한 자리에서 그에 대한 평가를 요구받자 “부디 오래 살아서 죗값을 치르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런데 죽어버렸다.

초겨울비가 내리는 이날 오후 벗의 전화가 왔다. 허탈한 목소리. “악인일지라도 한 인간이 죽으면 연민이란게 생기게 마련인데, 당췌 그런 맘이 안든다. 내가 독한 사람이냐?”

어찌 나의 늙은 벗 한사람 만의 생각이겠는가. NYT는 그의 죽음을 전하는 기사 첫문장을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80년대 대부분을 철권통치한 이 나라의 가장 비난받는(vilified) 군사독재자가 90세로 사망했다”고 썼다. 비난 받는 사람의 죽음에 연민을 느낄 필요는 없으되 광주사람을 또 한번 모진 사람 만드는 그의 죽음은 우리를 착잡하게 한다.

독재자의 만년은 비참하다. 폐 타이어더미로 화장된 독재자도 있다. 폴포트다. 밝혀진 것만 70만, 추정에 따라서는 200만명의 자국민을 학살한 킬링필드의 주범 그는 반군들에 쫒겨 밀림 움막에 살다가 클린턴 대통령이 국제법정에 그를 세우려하자 1998년 자살했다, 젊은 부인이 음독을 도왔다. 장작을 구할 수 없는 열대밀림에서 그는 추종자들에 의해 폐 타이어로 화장됐다.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는 반군들에 개처럼 끌려가 총살됐다. 2011년 아랍민주화 바람이 북아프리카로 번져 권좌에서 쫒겨난 그는 부하들과 탈출을 감행하다 프랑스 전투기의 폭격을 받고 겨우 달아나던 중 반군들에게 붙들렸다. 총알구멍 투성이의 그의 시신주변에서 반군들은 축포를 쏘며 환호했다.

아프리카의 독재자의 대표선수 이디 아민은 헤아릴 수 없는 기행과 살인을 일삼다가 탄자니아와의 전쟁에서 패해 사우디에서 망명중 고혈압으로 죽었다. 그의 시신은 우간다로 돌아가지 못했다.

필리핀의 마르코스도 결국 1986년 피플파워 국민시위로 축출돼 하와이에서 망명중 죽었다. 그의 시신은 미이라로 만들어져 18년간 필리핀 북부 그의 고향에 전시되다가 두테르테 집권후 2016년 마닐라 국립묘지에 묻혔다. 죽어서도 끈질긴 권력을 유지한 마르코스지만 이는 필리핀 국민이 떠안은 역사숙제다.

그에 비하면 전씨의 죽음은 평온하다. 그를 지지하는 세력들도 남아있다. 1995년 구속돼 최종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YS퇴임직전인 1997년 12월 노태우와 함께 사면 복권됐다. 가끔씩 5공 패거리들과 단합대회도 해가면서 살았다. 가족장을 치른다는데 이를 방해할 사람도 없어 보인다.

죽음을 앞둔 그가 특별성명 또는 기자회견 형식으로 한국 현대사에 대해 고백을 해줄 수도 있을 것이란 순진한 희망은 사라졌다. 그로 인해 목숨을 잃었거나 인생이 망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한을 풀 기회도 사라졌다.

그의 죽음과 함께 많은 이들은 광주발포명령자를 규명할 기회가 영영 없어진 것 아니냐는 탄식을 한다. 12·12 이후 모든 실권을 쥔 그가 발포명령의 최종책임자일 것이라는 건 누구나 미루어 짐작한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언제 어떤 경로로 누구에게 발포명령이 하달되었는지, 혹 그가 아닌 신군부 인사중 그릇된 판단으로 발포명령을 한 것은 아닌지 밝혀진 것은 없다.

지금까지 ‘발포명령’이란 글자가 적힌 유일한 군사문서는 80년 5월 20일 자정직후 보안사 505보안부대(광주보안대)가 작성한 ‘광주소요사태 21-57’ 이란 한 페이지짜리 문서다. 5월 20일 밤 11시 15분에 전교사 및 전남대주둔 병력(3공수)에 1인당 M16 실탄 20발씩을 지급하고 “실탄장전 및 유사시 발포명령”을 기록한 문서다. 다만 이 명령을 누가 어떻게 내렸는가만 안적혀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당시 계엄사령관 이희성이나 3공수여단장 최세창등이 입을 열어야 한다. 보스가 죽었으니 고백하기 쉬울 수 있다.

3저 호황속에 아! 대한민국 노래가 울려 퍼지던 무렵 나는 어떤 글에서 광주학살과 5공집권이 빚은 한국사회의 병리에 대해 이렇게 쓴 적이 있다. “그들이 권력을 잡고 휘두르면서 우리 사회의 정신은 뒤틀렸다. 아비가 아들에게 성실을 주문하지 못하고 선생이 학생에게 진리를 말하지 못했다. 오직 좋은게 좋은것이라는 처세훈이 젊은이들에게 권장되고 있다…”

정의고 나발이고 탱크로 권력잡아 복지국가 만들어줬잖아 하는 식의 천박한 생각을 국민들 머리에서 지우는데 삼십년이 넘게 걸렸다. 그리고 그 상징적 인간이 죽었다. 그가 화장되어 재가 되는 날 한국인 모두는 우리 현대사를 한번 돌아보고 어떻게 살아가는 국민이 존엄한가를 한번쯤 사색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