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문방송학과
조경완 교수
1972년 9월 29일 중화인민공화국 수상 저우언라이와 외교부장 지펑페이, 일본국 수상 다나카 가쿠에이와 외무대신 오히라 마사요시는 양국 국교수립을 명문화한 중일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여기서 중국은 중일전쟁 이래 제국일본에 의해 입은 피해의 배상청구권을 포기했다. 대신 중국은 공적개발원조(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형식을 빌어 일본으로부터 막대한 개발지원을 얻는다. 이 ODA는 2018년 중국이 G2를 자처하는 세상이 되기까지 무려 46년간 계속됐다. SOC건설, 연안개방지역 투자, 서부내륙 경제개발등 일본이 중국에 준 돈은 3조6천억엔이다. 차이니스 실사구시다.
꼬여만 가는 한일관계의 또다른 시한폭탄이 째깍거리고 있다. 그것은 대전, 대구지법을 통해 송달장이 발부된 미쓰비시중공업 한국법인과 신일본제철의 한국자산에 대한 압류의 현금화 시점이다. 법원은 2018년 일본강제징용 피해자 여윤택씨등 4명의 배상소송 최종심이 확정된 후 미쓰비시의 특허권 6건과 상표권 2건 도합 8억400만원상당에 대해 압류처분을 내렸다. 신일철이 갖고 있는 포스코 지분 3%에 대해서도 압류결정이 내려졌다. 두 일본기업이 즉각 항고, 재항고하여 또다시 대법의 판결을 기다리고 있지만 대일 개인청구권을 인정한 대법이 이를 뒤집을 리는 없고, 대략 내년 1월이면 일본기업의 재항고 기각결정이 내려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안에 두 일본기업들이 한국 대법 판결대로 1억~1억5천만원씩을 원고 여씨등에게 지급하지 않는 한 법원은 즉시 압류재산을 공매하여 현금화 한 뒤 원고들에게 지급하게 된다. 이 과정은 세계가 주시할 것이다.
한일 양국 중 자존심을 먼저 굽히는 쪽이 나서서 응급수리하지 않는 한 한국 대법원의 시계는 계속 돌아갈 것이고 파국은 현실이 될 것이다. 일본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전번처럼 반도체 제조물자 금수같은 조치를 훨씬 뛰어넘는 대응을 할 것이다. 비자제한, 일본내 한국기업의 송금제한, 심지어는 한국자산에 대한 보복압류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이쯤이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다.
일본과의 단교를 주장하는 정치인들도 나올 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 잔학상은 다시 조명될 것이고 쇼비니즘적 민족주의가 전국을 뒤덮을 것이다. 토착왜구를 색출하자는 홍위병식 주장에 사태를 수습할 현자들은 숨을 죽일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엔? 한국내 일본인들을 린치할 것인가? 북한과 손을 잡고 일본으로 쳐들어갈 것인가?
2012년 김능환 대법관이 내린 ‘역사적’ 파기환송심, 즉 “외교협정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 할 수는 없다”는 판결은 국민들이 보기에 정의로울 수 있다. 그는 판결문에 “일제강점기 일본의 한반도 지배는 규범적인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 논거로 제헌헌법에 나와 있는 “3.1 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선포”한 사실을 들었다. 그는 전후질서를 결정해나가던 국제조약, 즉 한국에 전승국 지위를 부여하지 않았던 샌프란시스코조약이나 한일 청구권협정의 징용자문제 해결조항을 따르는 것보다 천부의 권리인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 정의라고 양심에 따라 판결했을 것이다.
원고들이 졌던 파기환송심은 6년후 2018년 확정됐다. 이를 보고 고무된 징용피해자들은 85명이나 같은 소송을 냈다. 그러나 이번엔 서울중앙지법 민사부 판사가 각하해버렸고 그에 따른 혼란과 그 판사에 대한 전국민의 비난은 우리가 이달 내내 지켜봤다.
나는 이 와중에 침묵을 지키고 있는 정부를 이해할 수 없다. 기억을 조금만 되돌려 보면 노무현대통령시절 ‘한일회담 문서공개 후속대책 민관공동위원회’가 구성됐고 당시 이해찬 총리와 문재인 민정수석은 이 위원회를 주도했다. 민관 공동위의 결론은 "1965년 협정 체결 당시 제반 상황을 고려할 때 국가가 어떠한 경우에도 개인 권리를 소멸시킬 수 없다는 주장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이었다. 일본에 다시 법적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신의칙상 곤란하다고도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이후 자체적으로 피해자 보상에 착수하여 2007년 특별법으로 추가 보상을 시작했고 2015년까지 징용 피해자 7만2천여명에게 6천억원이 지급됐다. 이로써 우리나라에선 강제징용 배상 문제는 사실상 종결된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책임있는 정부라면, 사법부의 판결에 개입할 수 없다는 삼권분립 교과서를 되뇔 것이 아니라 이같은 사실을 국민에게 설명해야 한다. 반일정서가 정권에 이로운가 아닌가를 저울질 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일본에 물질적 배상요구를 포기하고 역사청산을 요구하는 도덕적 우위에 서자”(손학규 안) 라던지 “한일 양국 정부와 기업, 국민들이 참여하는 2+2+α 재단에서 3천억원을 조성하자”(문희상 안)와 같은 실질적 조치들을 강구해야 한다. 식민지시절 고초를 겪은 국민들이 일본으로 한국으로 고달픈 소송의 나날을 보내도록 방치하는 게 제대로 된 정부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