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역시 정치는 인간의 '후안무치'한 행위 중 하나가 분명하다. 적어도 여기서는 그래 보인다. 강요가 아닌 스스로 정한 약속도 나와 우리의 포식을 위해서 서슴없이 팽개친다. 최근 모 정당의 보스가 자못 늠름하게 내년 재보궐선거 후보공천을 위한 당헌개정에 전당원 투표를 하겠다는 '내로남불'식 자위책을 선언했다. 이를 잠자코 듣노라니, 이 당도 저 당이고, 저 분도 이 분이며, 새 것이나 헌 것도 그게 그거였다는 배신감과 절망에 영혼이 탈출한다. 모순과 궁색에 쩌는 '자가당착'의 액션이다. 비난이 마땅한 줏대 없는 양비론이 설득을 넘어 우리의 확고한 신념이 되는 기막힌 이야기 실제상황 모멘트다.
자살과 사퇴로 파국에 이른 두 도시 사건 모두 여느 비리와는 완연히 다른 '하드 크라임'이다. 권력을 빙자한 물리적 폭력이다. 타칭 "피해 호소인"들은 엄연히 존재하고, 여전히 두려움에 갇혀 있다. 그들이 내 딸이고 우리 가족이라면. 지킬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소인의 눈에도 오욕과 수치로 가득 찬 정치인의 선거에 자당 후보를 내세워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자언한다. 이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인지 도저히 모르겠다. 우리말의 쓰임이 갈수록 생소하다. 보스는 기자출신이다. 기사의 언어와 논리는 여차하면 이런 식으로 두루뭉술하게, 아니 본말을 분명히 되묻지 못하도록 '거시기'하게 쓰라고 배운 것일까. 마침, 분홍 원피스 정의파 의원이 일갈한 역전의 꾸중이 걸작이다. "비겁한 결정을 당원의 몫으로... 해괴한 말"이라고 언론은 인용한다.
그렇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비겁하고 해괴하다. 지금 이전에 국가를 주물렀던 또 다른 이들과 별반 다름이 없다. 절반의 국토에서 깨알같이 모인 국민의 촛불이 폭발처럼 환하게 타올랐을 때, 그들은 '도원결의' 달빛아래 한결같이 맹세했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공정하고 정직한 국가건설을 다짐했다. 이제야 보니 '공약'의 남발이었나. 덕분에 땅은 요동치고, 고소장이 휘날린다.
정말 그렇다. 그 매서운 외침과 약속은 정권연장이라는 집단 이기주의에 맥없이 무너져 허언과 구호로 전락했다. 대체 누구를 위한 권력의 재창출일까. 그들인가, 우리들인가. 민의로 세상을 바꾸었던 우리들이 맛봐야 할 달콤 사탕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오로지 일편 달심 정무스킬로 무장한 재상과 호위무사들은 백정의 칼춤을 춰대며 시위질이고, 바야흐로 집단난투극 촉발의 기세다. 유치찬란한 서부영화 제목인양, "저스티스 리그 vs 프로시큐터즈". 차라리 '에일리언' 시리즈에 가깝다. 우리 눈에는 그저 먹이를 다투는 볼썽사나운 짐승들의 세상이다.
'군주론'. 종교적 중세의 끝이자 인간적 근세의 시작인 르네상스 시대의 역작이다. 근대 정치사유의 시작으로 평가되며, 지도자의 능력과 역할을 상세하게 서술한 사상서이다. 마키아벨리는 그의 책 8장에서 정치인이 추구하는 목표는 권력의 획득이 아니라 "영광"이라고 말한다. 세속적이 아닌 종교적 의미의 명예이다. 최고의 지휘관으로서 역경을 이기는데 탁월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잔인하고 비인도적 처세에 능하다면 위대한 인간의 반열에 들어갈 수 없다고 가르친다. 악행은 권력 지탱에 힘이 될망정, 정치인의 최고목표인 영광을 얻는데 실패할 것이라며 '정치와 도덕'의 교류를 설파한다.
또한 9장에서 정치가로서 군주의 자세를 설명한다. 지도자는 민중과 항상 친선을 유지하고 "민중에 기초"를 두어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기에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 19장에서 군주는 무엇보다 민중의 증오를 받지 않도록 노력해야한다. 20장에서는 그가 오로지 무력에 의존하여 "민중에게 미움 받는 것을 개의치 않는 것은 잘못이다"고 말하며 군주가 가장 유의해야 할 것은 '민중의 신뢰'임을 강조한다. 23장에서 저자는 권력을 노리는 아부에 대해서, 군주는 아부꾼을 피하고, 진실을 토로하는 자를 꺼리지 않아야 한다고 경고한다. 16세기의 마키아벨리에게 정치는 군주가 '경세치국'의 도를 달성하는 수단이었다.
오늘, 우리를 위하는 지도자는 대체 어디에 있을까. 역사의 모든 정치인들이 다 철면피는 아니었을 게다. 혹 그들이 청룡영화상 황정민의 소감처럼, 민중들이 차려놓은 멋진 밥상에서 그저 맛있게 먹기만 한 것은 아니리라. 좀 더 의젓해지자. 난망한 시세에 검게 타는 속내와는 달리 요새 가을나무가 너무 이쁘다. "오매, 단풍들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