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아듀, 지상의 행복에게 작별을 고하노라/ 온 세상이 불안하다/ 우리 인생은 탐욕스레 쾌락을 좇았는데/ 죽음은 그것들이 한낱 놀이였음을 밝히는구나/ 그 누구도 그의 화살을 피할 수 없으니/ 나도 병들어 죽음이 필시 닥쳐오리라/ 신이여, 자비를 베푸소서."
1592년, 영국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토머스 내시가 쓴 '흑사병 시절의 기도문'의 첫 대목이다. 방탕한 세상에 재앙이 닥쳐왔음을 자백하며 장차 인류가 감당할 공포와 숙명에 대해 한탄한다.
흑사병, 혹은 영어로 '블랙 데스'(Black Death)라고 불리는 전염병은 원래 떼로 몰려다니는 야생 들쥐와 거기에 기생하는 벼룩에서 비롯됐다고 알려진다. 들쥐의 서식지는 '전염병 저장소'로 불려졌다. 사람사이에 발생하는 전염병은 보통 주거지 근처에 살기 때문에 집쥐나 곰쥐라고 불리는 '검정쥐'들이 페스트균에 감염됐을 때 발생한다. 최초의 숙주가 오염되자 굶주린 벼룩들이 생존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탈출하면서 병의 전파가 시작된다. 실크로드 출입과 무역선박의 왕래가 국제적 확산을 부추겼음은 당연한 인과다.
기록은 흑사병이 14세기 중반 중앙아시아의 건조한 평원지대에서 처음 발병했다고 전한다. 이후 시베리아 초원과 유럽의 동남부로 이동했으며, 마침내 서유럽을 지나 영국과 아일랜드에까지 퍼져나갔다. 페스트는 1346년부터 1353년까지 유럽 전역에 사납게 유행했으며, 1664년 런던 대역병, 1720년대 마르세유 대역병에 이르기까지 산발적으로 발생했다.
사망자 수는 세금장부에서 제외됐던 빈민층과 유아들까지 편입한다면, 당시 유럽인구의 약 60%에 달하는 1억 명 정도가 희생된 것으로 추산된다. 흑사병이 중세 말 유럽에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 급변과 대변동을 초래하여 세계사 흐름에 미증유의 변곡점이 됐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흑사병이 불러온 세상의 공포와 비극은 문학에도 생생히 기록됐다. 이탈리아의 작가 보카치오가 1351년 펴낸 '데카메론'이 그 대표적 사례일 것이다. 우리말로는 '10일간의 이야기'다. 작가는 서문에서 이 책이 불행에 빠진 사람들의 고뇌를 덜어줄 것이라며 위로한다. 1348년 흑사병이 번지자 3명의 청년과 숙녀 7명이 피렌체 교외의 시골별장으로 피신한다. 오후에 나무그늘에 모여서 한사람이 하나씩 모두 열개의 이야기를 나눈다. 10일간 머물렀으니 100여개에 이르는 갖가지 다양한 사랑과 지혜에 관한 이야기가 모인 셈이다. 중세에 경고성 메시지를 날렸던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견주어 보카치오의 작품은 인간의 현실적 가치를 강조하기에 '인곡'(Human Comedy)이라 불렸다.
중세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는 보카치오의 서사형식과 내용을 상당히 계승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30여명의 순례자들이 런던 템스강변 타바드 여관에 모이면서 시작한다. 1170년 헨리 왕에 의해 살해당한 토머스 베케트 성인의 순교지인 캔터베리 성당에 참배가는 길이다. 여정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오가는 길에 각각 2편의 스토리 콘테스트를 벌이고, 가장 잘한 사람에게는 여관주인이 식사를 대접한다는 방식이다. 초서의 사망으로 계획된 60편에서 24개만 출판됐으니 미완성의 작품이다.
초서는 '수녀시승의 이야기'에서 동물우화의 형식으로 1381년 와트 타일러가 주도한 농민봉기를 비유한다. 리처드 2세는 흑사병 발발 후 노동력 감소로 임금이 오르자 실질상승을 억제하고 인두세를 도입한다. 권력의 가혹한 조치에 배고픈 민중은 분노로 맞섰다. 전염병이 국가경제와 사회변혁의 발단이 되었다.
이밖에도 14행 소네트시의 대가 페트라르카는 흑사병으로 연인을 잃은 아픔을 행간에 담았고, '죽음의 무도'라는 뜻의 풍유적 예술장르인 '댄스 머카브라'가 유행했으며, 현세의 겸손을 지향하며 죽음을 기억하라는 '메멘토 모리'는 시대의 구호가 되었다. 재채기한 사람에게 잽싸게 건네는 "블레스 유" 기원도 흑사병의 초기증세와 관련된 관습이다.
2020년 2월 26일, 대한민국. 코로나19의 확진세가 놀랍도록 드세다. 상업적 영리주의와 문화적 편향, 천박한 정치공방과 종교적 광기가 더욱 솟구치는 욕망공화국. 가짜와 진짜를 가릴 수 없는 기막힌 실제상황. 위기와 공포가 곳곳에 서려있다. 미셀 푸코가 진단한 '대감호'의 현장이다.
드디어 생각과 행동을 바꿀 때가 닥친 것인가. 절제를 상실한 극단은 재앙을 부른다. 흑사병이 새겨놓은 역사의 지혜를 배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