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영문학과
김강 교수
"꺼져라." 황제단식의 비난에 휩싸인 황교안 대표를 찾아간 심상정 정의당 대표나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에게 한국당 지지자들이 욕설과 함께 쏟아낸 막말이 아니다.
셰익스피어가 1605년경에 쓴 스코틀랜드 비극 '맥베스'의 5막5장에 나오는 대사다. 마녀의 예언에 속아 왕위를 찬탈한 맥베스는 포악한 영구집권에 반기를 든 세력과 대항하던 중에 부인 레이디 맥베스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한다. 여기서 맥베스는 촌철살인의 독백 "내일, 그리고 내일"을 읊조린다.
"인생이란 그저 걸어 다니는 그림자, 연극 후 사라지는 가련한 배우, 그것은 소리와 분노로 가득 찬, 아무런 의미도 없는 백치의 이야기." 생존투쟁도 결국은 죽음으로 치닫는 기록일 뿐이다. 삶의 허무함을 이처럼 판타스틱하게 옮긴 말이 그 어디에 또 있을까.
연극무대를 통해서 셰익스피어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람에 대한 통찰력이다. 그의 작품에는 수 백 여명의 등장인물이 나온다. 왕과 귀족, 군인과 상인, 그리고 하인과 도둑에 이르기까지 그 계층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런데 그 인물들은, 마치 초서의 '캔터베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처럼, 각기 고유한 개성과 함께 자신의 믿음과 생각을 지니고 있다. 지위가 고귀하든 비천하든 간에 그들의 행위와 운명은 아주 '인간적'이다. 셰익스피어의 인물 중에서 나의 모습, 혹은 우리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는 큰 이유다. 따라서 무대 위 그들의 이야기는 바로 나와 너의 이야기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들의 운명을 미적거리를 유지한 채 관조하기보다는 스스로 몰입하여 감응한다.
셰익스피어는 사람의 말투와 행동, 그리고 심리까지도 세심하게 관찰하고, 이것들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지닌 작가일 것이다. 그는 다양한 개성을 지닌 사람들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겉보기에 분명히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비뚤어지게, 때로는 애매모호하게 드러낸다.
말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은 참으로 매력적이고 유혹적이다. 셰익스피어는 이러한 진리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물론 그의 인물들이 단지 셰익스피어의 의중을 전달하는 꼭두각시라는 의미는 아니다. '맥베스'에서 반역자 주인공은 당연한 최후를 맞이하지만, 극의 시작부분에 마녀들의 입을 통해 애매하게 제시되는 '정답 없는 변증법적인 수수께끼'같은 "선은 악이요, 악은 선이다"라는 대사는 극이 끝난 후에도 관객의 마음속에 의심의 파장을 일으킨다.
현실에서도 이 수수께끼는 마력을 발휘한다. 나와 네가 기대하는 답이 서로 다름이다. 말은 힘이 되고, 그 힘은 권력이다. 셰익스피어는 작품에서 말의 위력을 보여준다. 그 또한 말로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대중작가였다. 어떻게 보면, 셰익스피어의 희곡들은 '말의 효능'에 관한 임상보고서처럼 읽힌다.
햄릿의 복수는 아버지 유령의 말에서 비롯됐고, 이를 위장하며 들여다봤던 책도 말로 꾸며진 것이다. 아첨을 기대했던 리어왕은 막내딸의 솔직한 말에 분노하여 판단력과 영토 등 모든 것을 잃는다. 오셀로 역시 귀에 흘린 말에 맞추어 마음속에 시각적 증거를 만들어낸 후 마침내 부인을 살해한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언어마술의 호리병이고, 그의 무대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그러나 말의 의미는 오직 말하는 자만이 알고 있는 일방적 진실이 아니던가. 그래서 상대방의 뜻을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호도하거나 왜곡한다. 맥베스가 마녀들의 말을 전적으로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우리도 셰익스피어의 목소리를 시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한다.
그 언제부터일까. 수백만 촛불의 타오름이 서서히 꺼질듯이 흔들거린다. 개혁과 개악과 청산을 외치던 변화와 실천의 맹세들, 그 추상같던 말들의 위세가 벌써 덧없다는 낌새일까. 서슬 퍼렇던 호령들의 주체와 숨죽였던 객체가 '땡깡'의 깃발에 판세가 바뀐 듯 요새 시절이 하 수상하다. 그저 의혹과 불신의 아우성판이다. 조국에서 윤석열로, 친박에서 친황으로, 검찰에서 청와대로 정정의 파도가 다시 요동친다. 우리의 정치는 백치들이 고함과 소란으로 몰고 가는 계산된 몸짓일까.
진보든 보수든 우리 모두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을 원한다. 그 희망의 말을 언제나 들을 수 있을까. 내일, 그 내일이 어서 왔으면 참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