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할 권리, 듣는 용기, 그리고 바카라사이트 제작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한선 교수

꼰대로 진화 중인지 예상치 못했던 나이 어린 상대의 당돌한 반격이나 내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서 지적을 들으면 움찔했다가 괘씸해진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추스르며 사람이 나이 들면서 옹고집으로 변하는 것은 생각의 유연성이 떨어지기 때문인데 그 원인이 새로운 지식과 상황을 받아들일 능력도 여유도 부족하기 때문이라는 얘기를 꼭 기억한다. 그리고 듣기 싫은 말도 들을 줄 아는 용기야말로 멋지게 늙어가는 길이라고 다짐한다.

나는 개인적인 관계에서도 그렇고, 한 조직 안에서도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에서도 가장 필요한 덕목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관용을 꼽는다. 나와 다른 의견과 주장에 열려 있지 않은 조직이라면 아무리 뛰어난 리더가 이끌더라도 좌초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도 공감한다. 그래서 리더가 귀를 기울여야 하는 말은 윤기 흐르는 아첨이 아니라 심기를 거스르는 불편하고 괘씸한 생각들이다.


다양한 권력관계에 천착했던 미셸 푸코도 이 점을 잘 알았던 모양이다. 그가 말년에 매달렸던 개념 ‘파레시아(parrhesia)’에 관련 내용이 잘 정리돼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파레시아는 흔히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쥔 군주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줄 아는 ‘말하는 용기’로 널리 알려져 있다. 자신이 발언해야 하는 것이 진실이라면 이후에 돌아올 불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도 담대하게 저항할 줄 아는 용기가 바로 파레시아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대 민주주의에서 파레시아는 권력에 굴하지 않는 언론의 자유 또는 표현의 자유를 은유적으로 가리키는 말로 곧잘 소환된다.

그러나 내가 푸코의 파레시아 논의에서 더 주의 깊게 살펴보는 대목은 따로 있다. 말하는 사람에게만 용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도록 여건과 문화를 만들어주는 군주의 ‘듣는 용기’도 필요하다는 부분이다. 이를 명확하게 보여주기 위해 푸코는 파레시아는 ‘언제나 두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쌍방 간의 상호작용’임을 강조한다. 지도자가 파레시아의 능력을 갖고 그 신호를 보내야 신하들이 파레시아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지도자가 ‘듣는 용기’를 갖추었다는 신호를 보내고 신하는 대담하게 ‘말할 권리’를 행사하는 상호간의 능력이 형성되었을 때 비로소 조화롭게 유지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지난 2년여 동안 윤석열 정부가 보여준 파레시아 관리 능력은 낙제점을 주기도 아깝다. ‘사회혼란’ ‘가짜뉴스 대응’ 등을 내세우며 삭제조치를 속전속결로 결정한 풍자 패러디 사안은 웃픈 생각까지 들었다. 사상 초유로 세 번 연속해서 연출됐던 이른바 입틀막 장면, 언론사와 언론인에 대한 무차별적인 압수수색과 검열, 석연치 않은 이유로 잘 나가던 프로그램을 하루아침에 폐지하거나 진행자를 교체했던 조치, 지금도 진행 중인 ‘바이든, 날리면’ 논란과 재판결과, 그리고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의 ‘셀프민원’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가 유례없는 역대급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사례들이다. 내용적으로도 과징금 부과와 같은 실질적인 압박에서부터 각종 법적 제재를 통한 심리적인 압박, 소유의 민영화를 통한 구조적인 압박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가히 전방위적이다.

안타까운 것은 군사독재 시절을 떠올리게 할 만큼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하는 일이 지속되고, 해외 유수 언론과 국제기자연맹이 언론자유를 보장하라는 촉구와 우려를 나타냄에도 여전히 군주가 내보내는 파레시아 신호를 감지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더 안타까운 것은 총선에 집중된 이목 탓에 언론도 정치권도 자신들의 파레시아를 행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총선이 다가올수록 가짜뉴스를 내세운 언론통제가 더 많아질 것이다. 풍자패러디 삭제 조치도 인공지능기술이 가미된 ‘딥페이크(deep fake: 간단한 눈속임이 아니라 진짜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기술이 정교해 속임수의 정도가 깊다는 의미)’ 기술이 사회 혼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내려진 조치였다. 영상제작자 스스로 가짜임을 밝힌 풍자패러디였지만 여권 추천 인사들로 구성된 방심위(소위원회)에서는 고려되지 않았다.

가짜뉴스는 2016년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대선 캠페인을 치르면서 전 세계적으로 유행시킨 용어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가짜뉴스(fake news)’를 쏟아 부었던 그가 다시 오고 있다. 가슴이 더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