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어학과
김강 교수
영국의 소설가 찰스 디킨스가 1843년에 발표한 '크리스마스 캐럴'은 원제목 대신 스크루지 이야기로 더 유명하다.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방송은 물론 다양한 공연에 약방의 감초처럼 들어있는 레퍼토리다. 어린이 동화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걸리버 여행기'처럼 어른을 위한 교훈이다.
일설에는 소설 속 주인공이 실제로 영국에 살았다거나 디킨스의 친구였던 안데르센이 들려준 네덜란드 이야기를 영국식으로 각색했다는 등 작품 배경에 대한 흥미로운 추측들이 많기에 눈길 끄는 내용으로 이번 칼럼을 엮을 수도 있었지만, 크리스마스를 보름여 앞둔 이 시점에 못된 스크루지를 내세운 이유는 요즘 절실한 삶의 지혜를 우선 구하기 위해서다.
세상의 지혜를 배우는 데에는 실제 경험한 바가 목적에 가장 우선하겠지만, 예상치 못한 운명의 예리한 비수를 당장 막기에는 지금 나의 품새가 너무 볼품없어 고전에서 찾은 '전례의 보도'가 더없이 유용할 듯하다.
런던에 사는 스크루지 영감은 친구와 함께 빈틈없는 장사 솜씨로 큰돈을 벌었다. 친구의 장례식 날에도 일할 만큼 철저했지만, 거지조차도 동정을 구하지 않을 정도로 남에게 인색했기 때문에 그 누구도 다가서는 이들이 없었다.
크리스마스 이브날, 모든 사람이 즐거운 마음이지만 스크루지만은 예외였다. 그는 점원에게 밤늦도록 근무를 시키고, 하나뿐인 조카의 크리스마스 식사 초대를 거절하며, 구원의 기부를 요청하는 손길도 박대하여 뿌리친다.
그날 밤 그는 꿈속에서 쇠사슬에 묶여 다니는 죽은 친구의 유령을 만난다. 친구의 유령은 그에게 욕심의 포로가 되어 인생의 기회를 놓치고 후회하지 말라고 충고한다. 세 유령이 찾아올 것이며,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자신처럼 쇠사슬을 끌고 다니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알려준다. 세 유령은 바로 스크루지의 과거, 현재, 미래의 상징이다.
첫 번째 유령은 스크루지를 과거로 데리고 간다. 어린 시절 불쌍했던 모습과 함께 주인이 점원인 자신을 대했던 태도를 보여준다. 사랑했던 아가씨와 결별하게 된 이유가 돈에 대한 자신의 눈먼 욕망 때문이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두 번째 유령은 현재 크리스마스의 행복한 장면들을 보여준다. 크리스마스가 희생과 베풂을 의미하듯, 유령은 신비한 능력으로 다툼을 중재하고, 아픈 자를 치유하며, 빈자들의 빈궁한 그릇에 풍성한 음식을 제공한다. 스크루지로부터 볼품없는 급료를 받고 사는 점원의 집에서는 오히려 그를 위한 축복을 듣게 된다. 자신이 냉대했던 조카의 집에서는 자신을 끝까지 사랑하는 조카와 그의 아이들의 단란한 모습도 지켜본다.
미래의 유령인 세 번째 유령은 스크루지 영감의 최후를 보여준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도 않으며 물건마저 훔쳐간다. 마침내 자신의 묘지를 보게 된다. 묘비에는 이제는 스크루지라는 이름의 보편적 의미가 된 '구두쇠'라고 적혀있다.
악몽에서 깨어난 후 그는 새로운 세상을 경험한다. 주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따뜻한 마음을 베풀며 함께 나누게 되었다. 세상을 사랑과 감사, 축복의 눈으로 보는 법을 배운 것이다.
창업 이타주의 실천가 김갑용은 '아름다운 부자가 되자'라는 글에서 부자를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먼저, 자신을 위해서는 인색하고 남에게는 너그러운 사람으로 가장 아름다운 부자에 속한다. 다음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남을 위해서도 많은 돈을 쓰는 부자다. 돈을 버는 목적에 충실한 만큼 사회에 환원하기에 가장 이상적이라 할 수 있다.
세 번째는 그리 아름답지 않은 부자로 자기를 위해서는 항상 넉넉하게 쓰고 남에게는 인색한 놀부 같은 부자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에게도 인색하고 남에게도 인색한 수전노다.
물론 놀부와 수전노보다 더한 자는 제 것도 분에 넘치는데 남의 당연한 몫을 갈취하려는 악당들이다. 마치 모든 게 자기 것 인양 갖가지 부정한 사유로 겁박하며 타인의 생계와 복지를 파괴하는 행위는 철면피 스크루지의 분신 격이다. 탐욕과 오만의 대가인 끔찍한 형벌은 이미 단테가 '신곡'의 9층 지옥에서 생생히 보여준 바다.
한때 "부자 되세요"라는 카드회사의 광고가 사회적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모두가 이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마치 인생 마법의 주문처럼 지상 최고의 덕담이었다.
성현들은 부자 되기도 어렵지만 재물을 가치 있게 쓰는 게 더욱 힘들다고 가르쳤다. 마르크스의 예지처럼, 사람의 가치가 물질에 소외당하고, 삶의 정직한 영혼과 올바른 철학이 부재한 사회, 경쟁이 생존의 전쟁터가 된 지금 마당에 과연 그런 깨달음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반문해본다.
수억 원의 뇌물과 맞바꾼 감옥을 선호하고, 정직보다 돈이 더 중하다고 여기는 우리 청소년들의 반부패윤리 인식이 오늘 유난히도 마음을 괴롭힌다. 하긴,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온전치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