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업치료학과
김은성 교수
며칠 전 오래된 지인으로부터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반가운 인사가 끝나기 무섭게 전화기 저편에서 “요즘에도 많이 바쁘세요?”라는 한 문장이 필자의 귓가를 맴돌았다. ‘요즘에도? 내가 예전에도 이렇게 바빴었나…’ 하는 생각에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일상이다. 하지만 그 지인에게 필자는 ‘늘 바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혹여나 바쁘다는 이유로 그 지인과의 약속을 놓쳤다거나 모르는 사이 서운하게 했던 실수를 저지른 것은 아닌지 기억의 회로를 되감아 보느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재빨리 “아뇨~ 적당한 것 같은데요~. 괜찮아요”라는 필자의 대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근데 왜 항상 그렇게 바쁘세요?”하고 질문이 뒤이어졌다. 이미 ‘당신은 도대체 뭘 하느라 그리 바쁜지 이유나 좀 들어봅시다’였다. 평소와 다른 화제에 웃으며 대답은 했지만 사실 ‘적절한’ 답변을 찾지 못해 순간을 모면하고자 했던 것 같다. 통화를 끝내고 잠시 우두커니 선 채로 필자가 요즘 바쁜 상태인지, 또 무엇을 하느라 늘 하루 앞서 해야 할 일을 계획하고 시간을 쪼개어 써야 했는지 생각해보았다.
우선, 한 해를 마무리하는 달에 접어들자 마무리해야 할 일들, 그리고 내년을 위해 지금 시작해야 하는 일들이 12월 달력의 빈칸을 꽉 채우고 있었다. 나름대로 계획성 있게 생활한다고 자부하는 필자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갑자기 생긴 변수나 나 혼자서 하는 일이 아닌 경우엔 계획이 틀어지는 때가 있어 그것을 보충하느라 바쁠 수는 있다. 그렇다고 여느 유명한 작가처럼 집필에 몰두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든가, 새로운 가설을 입증하기 위해 이론을 세우고 연구하느라 바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늘 무언가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그러고 보니 무의식적으로 “바쁘다”라는 말을 달고 살았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실 아무렇지 않은 척, 괜찮은 척했지만, 업무 관련 문자 하나에도 심장이 빨리 뛰고 나 혼자만 아는 계획대로 일을 하면서도 행여 다 하지 못할까 전전긍긍하며 불안했던 나 스스로 나를 ‘바쁨’이라는 울타리에 가두어두고 자꾸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불안’을 던져주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바빠야만 하는’ 우리는 무엇을 하든 바쁘게 움직이고 설사 약간의 여유가 주어졌다 하더라도 ‘바쁘다, 바빠’를 입에 달고 살아야 남들과 발맞춰 살고 있다는 나름의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한 사람에게 많은 역할을 바라는 현대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라면 당연히 고개가 끄덕여지는 유행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도 결국 우리가 우리의 모습을 투영시킨 공감 타이틀인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정리해야 할 일도, 만나야 할 사람도 많다. 그런데 정작 ‘바쁨’ 울타리 안에서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쉼 없이 뛰고 있는 여러분 자신은 언제 만나고, 어떻게 정리할지 생각해보았는지 묻고 싶다. ‘바쁨’에 쫓겨 들여다보지 못한 가족, 친구, 지인들을 만나 안부를 묻는 것도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자신을 보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은 ‘시간 나면’ 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어서’ 하는 것이다. 2022년 올 한 해도 잘 보내준 나를 잘 다독여줘야 돌아오는 새해에 더 잘 해낼 수 있다. 내가 단단해야 오래, 그리고 길게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잘 지낼 수 있다.
이 글을 읽는 지금, ‘바쁘다’에 격하게 공감하면서도 정작 ‘무엇을’ 위해 ‘왜’ 그렇게 바빴는지 선뜻 말하지 못한다면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보길 바란다. 올해도 쉼 없이 달려온 나를 얼마나 잘 보살폈는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