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영문학과 1회 졸업생 노성기 광주대교구 신부, ‘교부학 권위자’ 명성 재확인 작성일 : 2024-10-19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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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 참여한 ‘교부학(敎父學) 사전’이 ‘제28회 한국가톨릭학술상’본상 수상
“삶과 신앙이 일치하는 삶, 교부들의 작품번역 등 공부하며여생 보낼터”
호남바카라 토토교(총장 박상철) 영어영문학과 1회 졸업생인 노성기 광주대교구 신부가 번역한 ‘교부학(敎父學) 사전’이 제28회 한국가톨릭학술상 본상을 수상했다.
노성기 광주대교구 신부가 하성수(시몬) 박사·최원오(빈첸시오) 박사와 함께 번역한 ‘교부학(敎父學) 사전’은 서기 1세기부터 8세기에 이르는 시기동안 활동했던 교회의 학자이며 사목자였던 교부(敎父)들의 생애와 신학사상을 자세히 다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교부학의 다양한 주제와 항목을 다루고 있다. 교부들은 누구인가? 교부들은 거룩한 삶을 살면서 정통 신앙을 지키면서 주로 희랍어와 라틴어로 신학 작품들을 남겼다.
호남바카라 토토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늦게 광주가톨릭바카라 토토교에 입학해 사제의 길을 걷게 된 노성기 신부는 교부학 전문바카라 토토원, 로마에 있는 아우구스티니아눔에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여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교부학 권위자로 2002년 최초로 한국교부학연구회를 창립해서 ‘교부문헌총서’의 기획저술을 이끌어왔다.
참고로, 아우구스티니아눔에서 교부학 박사학위를 받으려면, 희랍어와 라틴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해야 하고, 현대어 4개(이탈리아어,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중급 이상으로 해야 한다고 한다. 노성기 신부는 광주가톨릭바카라 토토교에서 2001년부터 18년동안 교부학을 가르치면서 광주가톨릭바카라 토토교 총장을 두 번 역임했다(2010년 9월-2014년 8월; 2014년 9월-2018년 8월). 그리고 2018년 9월부터 목포가톨릭바카라 토토교 총장을 하다가 건강상 이유로, 2020년 1월에 총장직을 사임했다.
노성기 신부는 “신학생 시절 교수이셨던 김희중 대주교께서 ‘교부학을 전공하면 어떻겠느냐?’는 권유로 시작해 위대한 교부들을 스승이자 멘토이자 친구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 회고하면서 교부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밝혔다.
"바카라 토토생활의 낭만과 젊음이 넘쳤던 호남대 쌍촌캠퍼스 재학 시절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도서관에서 매일 밤늦게까지 똑 같은 자리에서 공부했기 때문에, 모든 학생들이 그 자리를 내 자리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는 앉지 않았습니다. 거의 매일 밤늦은 시간에 도서관에서 나와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는 그 시간이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학창시절에 공부만 했던 것은 아닙니다. 한 달에 한 번씩 가톨릭써클 활동을 하면서 봉사할동을 많이 했습니다. 매년 겨울방학 때에 영광 ‘영민농원’에 있는 나환자촌에 가서 1박 2일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나병에 걸려 오랫동안 시달리다가 나병이 깨끗이 나았지만 손가락이 없는 사람, 손목이 없는 사람, 코가 일그러진 사람들을 처음 봤을 때의 그 충격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호남대 가톨릭써클 단원들이 그분들에게 연극도 하고 장기자랑도 하면서 그분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분들이 지극 정성으로 밥을 해서 우리에게 갖다 주시면, 그분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러나 그분들과 처음 밥을 먹을 때에는 밥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혹시 내가 나병에 걸리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그래서 억지로 목구멍에 밥을 쑤셔 넣었던 기억이 납니다."
"영어영문학과 학년 대표가 되어 영면학과 학생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많이 했습니다. 항상 솔선수범하면서, 고민하는 힉생들을 고민을 들어주고 도와주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나를 호남대 학생회 회장으로 추천했습니다. 그러나 학생회 회장은 다른 학생에게 사양하고, 나는 문예부장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1년동안 문예부장으로서 열심히 활동했습니다. 2학기에 문예부장으로서 축제위원장이 되어 아주 멋있고 재미있는 호남대 축제를 총괄 지휘했습니다."
노성기 신부는 “신앙과 삶이 일치했던 교부들의 가르침, 자선과 사랑 등의 가치를 본받으려고 지금도 항상 고3 학생처럼 살면서, 죽는 날까지 교부들의 작품들을 번역하며 충실히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